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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검정셔츠
    [끄적끄적 생각노트] 2022. 7. 11. 11:14
    출처 픽사베이


    이선생님은 자연갈색의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수업을 했다.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으나 날씬한 체형에 허리 라인이 잡힌 옷을 자주 입었으므로, 또 교실 앞쪽에는 강단이 있었으므로 선생님은 꽤 크게 보였다. 앉아서 올려다 보아서일까 아니면 그가 이미 수능이라는 벽을 넘어 돈을 버는 사회인이라는 경제적 차이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실제로 그의 키가 컸는지도 모르겠다.


    경은 이선생님이 검은 셔츠를 입고 온 날에는 하루 종일 설렌다고 말했다. 그 애의 교복 안에는 누군가를 의도 없이 좋아하는 마음이 들어있었다. 이선생님은 살짝 광택이 나는 검은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항상 앞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채로 수업에 임하였는데, 그것은 경의 취향을 저격했다. -저격이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의 피부는 하얀 편이어서 목덜미가 더 잘 보였는데, 경이 선생님이 너무 잘생겼다고 호들갑을 떨면 목과 귀가 붉어지곤 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남학생들은 어이가 없었으려나. 수능을 앞두고 별 생각이 없었으려나. 혹은 경을 짝사랑하여 그가 질투 났을지도 모른다. 이선생님의 형은 같은 곳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대개 분필을 집어던지곤 했다. 수업의 강조를 위해서였을까 본인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였을까. 하얗고 연약한 분필이 칠판에 툭 하고 던져져서 파편이 바닥에 데구르르 구를 때면 그 분필을 세게 밟아 가루로 만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다른 아이들은 두 이선생님이 형제임을 몰랐기에,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흥분이 일었다.


    남들이 다 아는 것을 알아도 기쁜 마당에,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밀의 공유는 내밀함과 친밀함을 함께 불러일으켜서 나와 네가 아니라 우리라는 감정을 일게 했다. 그 당시 감정의 동요와 공유가 적었던 우리에게 이런 비밀은 잔잔한 물결의 호수에 돌을 던진 격이었다.


    가는 방향이 같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던것같다. 형 쪽의 이선생님은 종종 차로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학원 차에 오를 때는 모두 다 똑같은 학생, 보잘것없는 하루로 느껴졌으나 이선생님의 차에 올라탈 때는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2시를 넘은 시각, 도로에는 몇몇 대의 차들과 트럭만이 갈길을 재촉했고, 정지선을 넘어 빨간불에도 다음 신호로 쌩하니 지나쳐갔다. 차 안의 적막은 엔진 소리와 나지막한 라디오 소리로 겨우 가려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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