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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2022 창작과비평 [195호 2022 봄호] 정지아_말의 온도_소설
    [읽은 책들] 2022. 6. 27. 15:26

    179p

    어머니와 말을 하다보면 이상한 대목에서 심장이 저렸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니고 외할머니의 딸이던 시절에는 먹고 싶지 않는 것을 먹지 않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처음부터 어머니가 아니라 한때는 마음껏 투정을 부려도 되는 딸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딸이었던 시절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숟가락을 든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마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 있던 어떤 시절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 터였다.

     

    182p

    딸 이혼한 게 그렇게 부끄러워?

    부끄러워 글가니. 요즘 시상에 이혼이 머 숭이나 된다냐? 씰데없이 숭잡힐깨비 글제.

    흉이나 되냐는 앞말과 흉잡힐까봐 그런다는 뒷말 사이의 모순을 어머니는 훌쩍 건너뛰었다. 앞말은 나를 보는 어머니 시선이요, 뒷말은 남의 시선, 모순을 품은 그 마음이 모정일 터였다. 그 마음이 짜증스럽기도 하고, 그 마음에 죄스럽기도 했다.

     

    182p

    식사 마저 하셔. 국 다 식겠네.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는 고개를 파묻다시피 책날개에 적힌 약력을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서울교대 졸업, 서울대 교육대학원 박사, 삼십삼년간 교사로 재직, 어머니가 소리 내 읊는 한줄 한줄의 내 부끄러운 시간들이 어머니에게는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살맛 나는 시간이었다.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어머니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박사학위를 받던 날, 어머니는 내 박사모와 가운을 입은 채 기쁨에 차오르는 눈물을 꾹 삼키며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손으로 자꾸만 내 등을 쓰다듬었다.

    183p

    교대 나와 남들 다 가는 교육대학원 졸업한 것이 전부인 인생이었다. 집에서 살림이나 살았으면 하는 보수적인 남편과 하루가 멀다고 싸울 때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고, 점점 되바라져가는 아이들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을 때는 내 인생이 고작 이 정도인가 허망하기도 했었다. 그런 인생을 어머니는 장하다고, 참말로 장하다고, 연신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어머니는 평범한 우리 남매를 하늘로 떠받칠 만큼 귀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고비마다 주저앉지 않고 그럭저럭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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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나같아서, 말소리들이 할머니가 떠올라서. 그래서 읽으면서 눈물을 절로 삼키게되는 그런 소설.

    행여 서울로 올라간 손녀딸이 밥 제대로 안챙겨먹을까봐 꾸역꾸역 돋뵈기를 쓰고 -밥먹었냐할머니가- 여덟 글자를 써 내려갔을 엄지손톱이 떠오르는 글.

    전화하면 손녀딸이 혹여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오지 않는 전화기를 붙잡고 한숨만 내쉬는 할머니가 떠오르는 글.

    힘든데, 죽을것같은데 입맛도 없는데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잘 산다고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눈시울 눌러가며 거기 있을 때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잔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너는 되게 밝은 사람같은데, 힘든 이야기를 남한테 안 할 것 같아.

    j는 나를 세 번째 본 날에 그렇게 말했었다. 

    나 인생에 힘든 게 별로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 물음표가 떴다.

    난 정말 내 힘든 이야기를 남한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것 아닐까?

    이전보다 많이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아직 모든 걸 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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